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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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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rketerJ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5-03-3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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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송종헌▲ 송종헌ⓒ 나무위키'대한제국 팔아넘기기 경쟁'의 3대 친일파는 이완용과 송병준·이용구다. 이완용은 일제 침략의 결실이 무르익어 땅에 떨어지려 할 때마다 고종과 황실을 압박해 최종 결과물을 일본에 갖다 바쳤다. 그는 최종 문서에 찬성 의사를 표시하는 방법으로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내정·군대 장악)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의 주역이 됐다.친일파의 대명사 자리를 이완용에게 빼앗긴 송병준과 이용구는 1904년부터 극우단체 일진회를 움직여 그 결실이 무르익게 하는 방법으로 일본에 협력했다. 그렇지만 막판에 최종 결실을 건네주며 감사 인사를 받는 역할은 이완용의 몫이었다.경쟁은 송병준과 이용구 간에도 치열했다. 송병준은 북도인 함경도 사람이고, 이용구는 남도인 경상도 사람이었다. 송병준은 제도권 관료 출신이고, 이용구는 반체제 세력인 동학군 출신이었다. 초지일관하지 못한 이용구는 일종의 대한제국판 뉴라이트였다.출신이 달랐던 송병준과 이용구는 대한제국 매각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송병준은 한일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자고 주장했고, 이용구는 연방 형식의 통합을 주장했다. 1910년에 일본은 대한제국을 아예 멸망시켰다. 송병준이 승리한 셈이었다. 그 뒤 송병준은 자작과 백작 작위도 받고 홋카이도 땅도 받았다. 반면, 초지일관에 실패한 뉴라이트는 훈장을 받는 데 그쳤다.송병준은 이용구는 제쳤지만, 이완용은 제치지 못했다. 이용구와 함께 극우세력을 움직여 한일 협력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마침표 찍는 역할을 챙기는 데는 실패했다. 이완용을 끝내 넘어서지 못한 송병준의 친일 방식은 그의 아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위에 설명한 송병준의 특성들은 아들 송종헌의 친일에서도 유사하게 구현됐다.송종헌은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의 해인 1876년에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12세 때 소과(小科) 과거인 진사시에 급제하고 13세 때 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송종헌이 태어난 때부터 일본을 도운 송병준은 1882년 임오군란 때 가재도구가 불타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가옥과 재산을 잃었다. 갑신정변 뒤에 송병준은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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